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인 안적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 692번지 앵림산(鶯林山, 일명 장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승용차편
안적사는 해운대에서 송정터널을 지나 송정삼거리에서 기장 가는 국도를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삼양라면 공장이 나오는데 여기를 지나 신호등 앞에서 좌회전을 하면 제대로 접어든 것이다.
여기가 소정마을인데 마을을 지나 내동 방향으로 4.5km정도 비포장도로를 가다보면
인공저수지를 만나게 되고 계속 오르다 보면 안적 청정도량에 들 수 있다.
반면 동래 쪽에서 안적사를 찾아올 때는 충렬로타리에서 반송 쪽으로 가다 반송에서 반송우체국을
보고 일단 우회전을 하면 영산대 반송캠퍼스(옛 성심외국어대학)길이다. 가파른 길을 계속 오르다 보면 예비군 훈련장이 나오는데 여기를 통과해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구불구불 타고
3km정도 산길을 가다보면 안적사에 당도할 수 있다.
대중교통편
대중교통 편은 썩 좋지 않다. 택시를 타고 오르기도 힘들다. 단지 반송동에서 하루2번 운행하는
사찰소유의 셔틀버스만 운행할 뿐이다. 아직 사찰까지 도로가 놓여 있지 않아 조금은 불편하나
유서깊은 산사를 찾는 맛은 이보다 더 할 수 없다.
「기장현읍지」에 안적사는 현청에서 남쪽으로 10리에 있는 앵림산에 있다고 하여 옛부터 기장현의
4대 명찰(선여사:멸실, 취정사:멸실, 안적사, 장안사:척판암 포함)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는데 사찰의 규모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안적사의 창건을 전하는 설화가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본 안적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원년(서기 661년)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여 정진에 전념하던 시절, 이곳 동해가 훤히 바라보이는 장산기슭을
지나갈 때 숲 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 날아와 두 스님의 앞을 가로 막으며
어깨와 팔에 안겨 평화롭게 보이는 것을 보고 이곳이 보통 상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원효조사께서는 지금의 안적사터에 가람을 세웠으니 이것이 처음 안적사가 창건된 것으로
개산조(開山祖)가 원효(元曉)스님이다.
어느날 두 스님을 똑같은 시각에 공부를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오도(悟道)를 하게 되면
만나자고 맹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의 세월을 보낸 두 스님은 성불에
입문하신 어느 날 의상조사께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공(天供)을 매일 사시(巳時)에 올리게 되었다.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스님를 청하여 같이 공양하자며 천공을
같이 하려는데 천녀가 나타나질 않았다. 원효스님은 기다리다 그냥 토굴로 돌아가야겠다고 하고
내려간 뒤에 천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의상스님은 심히 천녀를 나무라니 천녀가 하는 말인즉,
이곳 가람 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 차있어 무서워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의 신통으로 의상스님의 교만한 마음을 알고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은 것이었다.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의 도력이 자기보다 훤씬 높다는 것을 알고 교만하지 않고
원효스님을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셨으며 이곳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여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 지도했다.
이후 처음 꾀꼬리를 만난 산을 앵림산이라 임하고 이 곳에서 정진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요달해 적멸상(寂滅相)을 통관했다 하여 절이름을 안적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후 원효스님이 창건한 안적사는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 모이듯 하여
남방수선제일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그 이름을 떨쳐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안적사 창건설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의상스님 관련 설화의 내용과 주인공만
차이가 있을 뿐 얘기의 뼈대는 거의 같다.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의 의상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가 있는 곳에
이르니, 그 이웃에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있었다. 늘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청했다.
의상이 와서 자리에 앉은 지가 오래 됐는데 하늘의 공양은 때가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가니 천사는 그제서야 내려왔다.
율사가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늦었소?” 천사는 답했다.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호위가 있음을 알고 그의 도력이 자기보다 나음에 굴복하여 그 공구(供具)를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대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던 것이다. 의상법사는 도선율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율사는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마흔 이(齒)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리들을 위해 천제에게 청해서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 보내어 복받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후에 율사는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에게 전했더니 상제는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은 예를 행하고 이것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삼국유사」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안적사 창건설화는 이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되 등장인물을 의상과 도선 대신에 원효와 의상에 대한
원효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곧 당대 쌍벽을 이루었던 의상대사와의 비교를 통해 안적사를 창건했다는 원효의 불교사상이 더욱 심오하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적사 창건설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라는 점은 원효와 의상이 성종 도입 후에나 가능한
수선(修禪)에 힘썼다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안적사는 또한 임진왜란 때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기장현읍지」에 따르면 최개동이란 기장음 내리 출신 사람이 임진왜란 당시 가족들과 앵림산 안적사 일대로 숨어들면서 왜적들에게
대항했으며 국왕도 큰 공신으로 봉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안적사는 임란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래 지역의 범어사가 그러했듯이 왜구의 침탈이 잦았던 변경지역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왜적을 막으려 했고 아울러
왜적의 침입을 막는 실질적인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안적사는 선승들의 수행처임과 동시에 호국도량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한가지 창건설은 반송2동 운봉 부락 뒷산인 개좌산 중턱에 운봉사라는 고려시대의 절터가 있다.
현재 석탑의 옥개석을 비롯해 기와, 토기, 청자 등의 파편이 있다. 옥개석의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창건시기를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일부 주민들은 이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기장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안적사로 바꾸었다는 말도 하고 있으나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쨌든 현재의 안적사 경내에 들어서면 예전의 사찰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문무왕 원년(661) 원효스님의 창건 이후 조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사찰을 범어사 묘전화상(妙全和尙)이 중건했고 동치(同治) 12년(1873) 계유 11월 15일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스님이 3차로 중수했다. 지금 대웅전에 봉안된 아미타 삼존불상은
바로 묘전스님이 장창할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안적사는 해방 후 거의 폐사가 되고 소실되었던 것을 1973년 3월 1일 덕명스님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2동, 사천왕상, 범종, 후불목탱화, 지장목탱화. 신중목탱화,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중건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덕명스님이 지난 2003년 입적한 이후
상좌인 법안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안적사는
덕명스님의 불사에 대한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글 발췌 : http://www.koreatemp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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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안적사가 1400년 고찰? 원효대사가..전혀 몰랏었네요.
그냥 얼마안된 보통 절인줄 알았더니 그야말로 문화재급이네요. 안적사 보니 너무나 반갑네여.
반송살때 어릴대 몇번가고 소풍때도 갓었나?모르겠지만 하여간 너무 반갑네요.
길도 생기고 많이 좋아졋구나.언제한번 곡 가봐야겠다.